임지원 전 금통위원이 들려주는 한국 금융시장의 젠더 이슈 현주소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며 원앙새 같은 결혼생활을 하길 바라며 키웠던 딸이 JP모간 이코노미스트로 20년 넘게 일한 뒤 한국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7인의 위원 가운데 한 자리를 역임했다.

올해 5월 4년간의 임기를 마친 임지원 전 금통위원이 1990년대 후반부터 걸어온 행적이다. 다음은 임 위원이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면서 경험하고 생각한 한국 금융계 여성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상에 대해 밝힌 내용을 대화형식으로 요약했다. 블룸버그뉴스와의 인터뷰는 지난달 초에 이뤄졌다.

Q. 피아노 전공을 시작으로 유명 이코노미스트가 된 과정

지나고 보면, 제 적성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만으로 6살 무렵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막연하나마 나의 장래 희망은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었다. 부모님의 선호가 많이 들어간 바람이었다. 예술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적성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됐다. 피아노 연습이 즐겁지 않았다.

대학에서는 영문학 전공으로 시작했는데, 이후 여러 시행착오를 거듭하다 졸업할 즈음에는 경제학 전공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영문학은 인간과 사회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문제점을 들여다 보는 학문인데 반해, 경제학은 상대적으로 해답에 보다 집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사고하는 방식이 명료하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외환시장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이 과정에서 이론과 실제 사이에 엄청난 괴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졸업 이후 기회가 된다면 금융시장에서 일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JP모간에 입사할 당시 인터뷰에서 커리어 계획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솔직하게 한 3년 정도 금융시장을 경험한 다음 연구소나 대학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대답했었다. 그런데 결국 20년 넘게 JP모간에서 일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 회사에서 어떻게 그렇게 오래 있을 수 있냐고 물어보는데 정말 그 모든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20년이란 세월은 상당히 긴 시간일 수도 있지만 크게 보면 글로벌 경기 사이클이 2~3회 지나가는 정도의 시간이다. 매 경기순환이 다른 모습으로 찾아오다 보니 늘 배울 것이 있었다. 금융시장에서 일하면서 내 학습 커브가 계속 우상향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어 감사했다.

Q. 모친께서 딸들을 음악으로 인도한 이유

어머니가 생각하시기에 결혼한 여성이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은 음악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결혼 전에 학교 선생님으로 계시다가 결혼을 계기로 직장을 그만뒀다. 당시로서는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직장을 그만두고 가정주부로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경제적 자립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셨다. 아버지는 대단히 관대한 분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 스스로의 수입이 없다는 점이 커다란 스트레스였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딸 셋을 키우면서 결혼 후에도 경제적인 자립이 가능하도록 도와주고 싶어하셨다. 고민한 결과, 음악을 해서 집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또 기회가 되면 대학에서 강의도 하는 삶이 가능하도록 인도해주셨다.

즉, 어머니께서는 당시 기준으로 여성이 일과 삶의 균형을 가장 잘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음악 전공이라고 생각하셔서 딸들이 모두 음악을 배우도록 했다. 어머니께서 아시는 한 딸들이 가장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음악이었다.

사실 제 이름에도 젠더 이슈가 들어있다. 제 형제들은 모두 이름에 ‘원’ 자가 들어가는데 딸들에게는 원앙새 원(鴛)자를, 그리고 아들에게는 으뜸 원(元)자를 주셨다. 자식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부모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이 아들에게는 으뜸이, 딸에게는 원앙새같은 결혼생활이었던 셈이다.

Q. 여성으로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에서 일하면서 느낀 점은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국내 경제연구소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기억하기에 박사 인력만 100명 내외인 대형 연구소였는데, 제가 첫 번째 여성 박사였다. 물론 학사나 석사 학위를 가지고 연구를 보조하는 직위에는 여성들이 있었지만, 프로젝트를 이끌고 방향을 논의해야 하는 자리에는 여성이 처음이었다.

당시 동료들은 대단히 친절했고 의식적으로 여성을 비하하려는 시도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여성과 함께 일해 본 경험이 없어서 진지한 일 얘기를 할 때는 제가 있는 것을 불편해 했다. 제가 처음 입사한 년도에 프로젝트들에 대한 외부 평가를 받았는데, 제가 참여했던 프로젝트가 1등을 했다. 그런데 이후 여성이 있는 팀이었기 때문에 1등으로 평가받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JP모간에 입사한 이후에는 젠더 이슈에 크게 영향 받지 않았던 것 같다. 다만 홍콩에서 1년쯤 근무한 이후 한국에 JP모간 서울지점이 생기면서 재배치를 신청했는데, 처음에는 좀 고생을 했다. 1990년대 후반만 해도 일하는 여성에 대한 인식이 홍콩과 한국 간 큰 괴리가 있었기에 제가 근무지를 옮기는 것에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특히 당시 한국에는 시장 이코노미스트(market economist)가 흔하지 않았고, 게다가 여성 이코노미스트는 전혀 접해보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이러다 보니 심지어 동료들 중에서도 ‘남성 중심의 한국사회에서 과연 여성 이코노미스트가 하는 말이 제대로 신뢰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라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들이 있었다고 들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한국에 와서도 젠더 이슈로 크게 어려움을 겪은 기억은 많지 않다. 회사내부의 경우, 워낙 인력 운용이 타이트하고 일의 성격상 성과가 가시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젠더 이슈가 생길 틈이 없었던 것 같다. 외부 고객의 경우 초기에는 다소 불편하거나 부딪혀야 하는 상황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이코노미스트라는 직업이 주로 보고서를 통해 고객들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마침 제 이름이 중성적이다 보니 여성이 쓴 보고서라는 편견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런 만큼 젠더 이슈로 인한 불이익에 덜 노출됐던 것 같다. 일단 평판이 확립된 다음에는 여성이라는 위치가 반드시 불리한 것만은 아니었고, 또 사회 전체적으로도 젠더 이슈를 개선하고자 하는 요구가 점차 커졌기에 앞선 세대보다는 우호적인 환경에서 일했다고 생각한다.

Q. 좋은 멘토가 있었는지

워낙 주변에 좋은 분들이 많았는데, JP모간 입사 초기에 한 직장 동료의 조언이 기억난다.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문제에 정해진 답이 있다는 가정하에 교육을 받는다. 그러다 보니 저 또한 보고서를 작성함에 있어 가장 올바른 답, 또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답을 찾는 것에 집중했고 결과적으로 입사한 이후 처음 2~3개월 간 보고서를 작성할 때 상당히 소극적으로 접근했다. 그때 한 동료가 ‘우리가 너에게 바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가장 올바른 의견이 아니라 너의 생각이다. 너의 생각을 보여주면 우리가 여러 다른 의견을 취합해서 나름의 결정을 내릴 것이다. 따라서 네가 가장 올바른 대답을 내릴 필요는 없다‘고 했고 그때부터 굉장히 자유로워졌다. 틀릴 수 있는 자유를 갖는다는 것이 정말 좋았다.

JP모간의 토론문화도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저와 함께 일했던 많은 분들이 제 멘토였다고 생각한다. 특히 글로벌 경제 리서치 부서의 경우, 경제 상황에 대한 개별 팀원의 의견이 헤드의 의견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때 팀원의 방어가 강할수록 평가가 좋고 토론 분위기도 더 좋아지는 것을 많이 느꼈다. 수직적인 문화가 강한 국내 기업이나 기관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소통 방식이었다. 제가 금통위원으로 있는 동안 이같은 토론문화를 한국은행에 접목시키려고 노력했는데, 얼마나 결실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Q. 한국 금융업계의 젠더 이슈는 어떻게 변해왔고, 앞으로는 어떤 논의가 필요한가

젠더 이슈는 여성인력의 공급 문제를 빼고는 말하기 어렵다. 제가 커리어를 시작한 1990년대 후반만 해도 여성 인력 공급이 적었다. 그렇다 보니 남성들 입장에서 극소수인 여성 동료를 동료가 아닌 여성으로 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여성의 비율이 늘어날 경우 자연스럽게 동료로 보게 된다. 여성들을 빼고는 의사결정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어느정도 상황이 개선되고 있다. 특히 2000년대 중반 정도부터는 여성들의 금융업권 진출이 두드러지게 늘어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따라서 10년 뒤면 꽤 많은 여성들이 시니어로 진출하게 될 것으로 본다. 그런 의미에서 젠더 이슈는 보다 더 개선될 것이다.

다만 민간 영역과 공공 영역의 개선 속도가 다를 수는 있다. 아무래도 민간의 경우 실적이 눈에 보이다 보니 젠더 이슈가 조금 더 빨리 없어질 수 있다. 반면, 공공 부분은 실적이 눈에 보이지 않고, 어떤 정책의 결과가 나타나는데 10년이 넘게 걸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보니 공공기관의 경우 여성에 대한 고려가 그저 상징적인 수준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또한 여성을 고위직에 임명하는 경우에도 이러한 접근이 많은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고위직 여성들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

상징적인 차원에서 고위직에 임명된 경우라 해도 그 임명된 여성이 일을 잘해서 경쟁력을 보여줘야 여성 후배들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저는 회사에서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되도록 하지 않았다. 남성 동료들을 보면, 여성 동료를 대할 때 가끔 자신의 어머니처럼 전문지식과 직장생활 배경이 없는 여성을 대하는 방식이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경우가 있었다. 제가 가족과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순간, 저를 보는 남성 동료의 시각이 직장동료에서 한 가정을 이끄는 주부로 조금씩 옮겨가는 것을 느꼈다.

만약 남성들이 의식적으로 여성을 차별한다면 이는 부당한 일이니 만큼 당연히 문제를 제기하며 맞서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무의식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여성들이 좀 더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편이 나을 수 있다고 여성 후배들에게도 조언한다.

그리고 긴 시각에서 보면 이제 젠더 이슈를 소수자 이슈보다는 다양성 이슈로 접근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 한 예로, 매니지먼트 차원에서 보면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관리하는 경우와 하나씩 차례로 해결하는 경우에서 남성과 여성이 다른 강점을 보인다. 그리고 다양한 캐릭터가 더해져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직군이 상당히 많다. 결국 젠더나 인종, 그리고 심지어 학벌 등 여러가지 측면에서 다양성이 있는 경우에 좀 더 좋은 성과를 내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Q. 여성 금통위원으로서 기여한 바가 있다면

우선 제가 금통위원으로 왔을 때 여성 보좌역이 아무도 없었다. 금통위원 7인 가운데 한국은행 총재와 부총재를 제외한 5명에게 각각 1인의 보좌역이 있는데, 5명이 모두 남자였다. 그래서 제가 제 보좌역으로 먼저 여성을 임명했다.

여성 금통위원과 여성 보좌역이 한 팀을 이루면 다른 위원들과 너무 분리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여성 보좌역을 뽑지 않는다면, 다른 금통위원에게 먼저 여성 보좌역을 선택하라고 요구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저와 호흡을 맞춘 보좌역이 성실하게 일을 잘 했고, 점차 다른 금통위원들도 여성 보좌역을 뽑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결국 제가 임기를 마칠 때는 보좌역 5명 가운데 3명이 여성이었다.

금통위원의 보좌역은 대단히 중요한 자리다. 특정 부서의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은행에서 하는 많은 일을 전체적인 시각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 고위직들 가운데 다수가 금통위원 보좌역 출신이다. 현재 여성 보좌역이 늘어난다는 것은 10년 뒤에 실제로 정책을 결정하는 그룹에 여성이 있을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고위직 임명이 아니라 통화정책을 담당하는 경력을 꾸준히 쌓아가는 인력이 늘어난 결과로 여성 고위직이 증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Q. 마켓 이코노미스트 출신 금통위원으로 기여한 점

한국은행은 정책기관인 동시에 시장의 일부다. 많은 정책들이 시장을 통해서 작동하기 때문에 금융시장 배경을 갖춘 사람들이 정책에 좀 더 많이 참여하게 되길 바라고 있다.

아무래도 중앙은행 사람들은 대단히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진행하는 스타일이다. 불확실한 미래를 예측함에 있어 다양한 시나리오를 적극적으로 고려하기 보다는 이미 나온 데이터를 위주로 정책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저는 시장 이코노미스트 출신으로서 미래를 전망하는 시각을 훈련해 왔다. 시장의 변동성이 컸던 최근 몇 년간 제가 금융통화위원회에 이같은 시각을 더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지난 20여년 간 시장 이코노미스트로 일하면서 인바운드와 아웃바운드 투자 양쪽을 다 커버했다. 따라서 한국 입장에서 당연한 전제들을 바탕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들에 비교·분석해서 설명하는 일에 익숙하다.

금통위원으로 있는 동안에도 한국의 경기와 물가 상황 등이 여타 국가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파악하면서 논의하고자 했다. 이같은 접근이 코로나 이후 한국이 주요국 대비 금리인상을 먼저 시작하는데 도움이 됐을 것으로 생각한다.

Q. 이코노미스트와 금통위원 역할을 비교한다면

커버하는 영역은 많이 다르지 않지만, 보는 각도가 다르다. 같은 산을 다른 길로 올라가는 셈이다.

시장 이코노미스트의 초점은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이다. 반면 정책 당국자는 ‘어떤 정책을 펼쳐야 하는가’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무엇을 할 지를 올바르게 결정하려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확고한 뷰가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책이 포괄하는 영역이 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차이는, 업무에 대한 피드백의 속도이다. 시장 이코노미스트의 경우, 예측과 분석에 대한 피드백이 명확하고 빠르다. 실적이 측정 가능한 셈이다. 반면 정책의 경우, 내가 한 결정이 적절했는지에 대한 피드백이 뚜렷하지도 않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이슈에 대해 시장에서 일할 때보다 좀 더 다양한 측면에서, 그리고 보다 긴 시각에서 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Q. 앞으로 계획은

지금은 좀 쉬면서 그동안 개인적으로 소홀히 했던 부분에 집중하고 싶다. 어차피 규제 때문에 3년간은 동종업계에 취직을 못한다. 물론 해외에서의 취업은 제한이 없지만 국내에서 제가 가지고 있는 전문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곳은 학교와 연구소 정도 일 것 같다. 어쨌든 당분간은 쉬면서 개인적으로 놓쳤던 일들을 좀 돌아보고, 이와 동시에 제 학습 곡선이 계속 우상향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사회에 좀 더 기여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등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 기사 문의: 최환웅 기자 wchoi70@bloomberg.net